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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주영의 유산과 난임이라는 현실

by imtbp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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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가 사라졌다는 말, 그 안에 감춰진 눈물 – 오주영의 유산과 난임이라는 현실

〈언젠가는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 10화에서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한 장면이 있었다. 의학 드라마답게 많은 환자와 수술, 긴장감이 오가는 순간들이 펼쳐졌지만,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은 건 오주영의 유산 고백 장면이었다. 격한 울음도, 감정 폭발도 없었지만 그녀의 그 차분한 표정과 담담한 말투는 보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오히려 울지 않아서 더 아프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더 슬펐다. 그 한 컷, 한 대사에 담긴 의미를 곱씹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쉽게 여성의 몸, 특히 난임을 겪는 여성의 감정과 신체의 무게를 잊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오주영은 말했다. “91이었는데 153이었고, 지금은 더 떨어졌네. 화학적 유산이래.” 이 말은 너무 간단하고, 너무 과학적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말이 더 깊게 박힌다. “기대 안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기분 나쁘진 않네. 심장 소리 들은 것도 아니고, 태동도 없었고. 세포가 없어진 건데 뭐.” 의사로서, 여성으로서, 난임을 겪어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내뱉은 이 말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들렸다. 세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아이였다. 그 기대는, 그 기다림은, 단지 혈중 호르몬 수치의 상승과 하강 그 이상이었다.

 

난임을 겪는 사람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버텨야 한다. 생리를 할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고, 배란일을 계산하며 성관계를 ‘계획’해야 하고, 수치로만 존재하는 가능성 앞에서 매달 무너진다. 오주영도 마찬가지였다. 임신을 위해 디카페인만 마시고, 커피 한 잔도 스스로를 위해 허용하지 않던 나날들. 그녀가 말한 “그새 버릇했나 봐”라는 말은 몸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몸은 아직 임신 중이었던 상태를 기억하고, 마음은 이제 와서 그 시간을 스스로 없던 일처럼 처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겪은 상실이, ‘슬픔’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담담함, 그 담백함이 모든 감정을 덮고 있었다. “괜찮아, 또 하면 돼.” “신에게는 두 개의 배아가 남아있거든.”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그 말의 끝은 늘 허공에 맴돈다.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혹은, 그 말을 믿고 싶어서 꺼내는 것일까.

 

난임의 과정은 단지 병원을 오가는 진료의 연속이 아니다. 진단부터 시작해 난소기능 검사, 자궁 내막 검사, 호르몬 주사, 채취, 수정, 착상까지. 여성의 몸은 수많은 주사와 약물에 노출되며 매달 임신이라는 희망에 맞서 버텨야 한다. 그 사이에서 한 번의 ‘착상’은 단순한 의료 성공이 아닌 인생 전체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다. 그 착상이 실패할 때마다 무너지는 건 그저 수치가 아니라, 사람이다. 꿈이고 기대이고, 그 사람의 하루 전체였다.

 

오주영이 유산을 고백하는 그 장면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그녀는 이미 4년 전의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 이 과정의 현실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아팠다. 더군다나 4년 전 유산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상처는 더 깊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때는… 아이가 배고팠을까 봐, 나 때문에 유산한 것 같아서… 내가 엄마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어.” 이 대사 하나로 우리는 그녀가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얼마나 스스로를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미움은 다시 임신을 준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커피 한 잔. 밥은 됐다며 시원한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원했다. “시원하게 커피 한 잔만 사 줘라.” 그 커피 한 잔 속에는 임신을 준비했던 시간, 그동안 참았던 유혹, 임신 중일 수도 있다는 불안, 그리고 다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현실까지 모두 녹아 있다. 누구에게는 하루의 시작일 수 있는 커피 한 잔이, 그녀에게는 포기와 수용, 그리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였다.

 

이 장면을 보며, 필자는 울지 않아서 더 울컥했다. 감정의 회피가 아닌, 감정과의 동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뭉클했고, 한없이 애틋했다.

난임은 흔하다. 하지만 난임을 겪는 여성의 내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매달 반복되는 실망,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감정. 오주영은 그런 현실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세포가 없어진 거니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단지 세포였던 적은 없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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