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솜이 정체 유력후보 3가지 [천국보다 아름다운]

imtbp 2025. 5. 1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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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이 정체 유력후보 3가지 [천국보다 아름다운]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매회 깊은 감정선과 상징적 서사를 동시에 끌고 가는 드라마다. 그중에서도 최근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은 단연 '솜이'다. 한지민이 연기하는 이 정체불명의 여성은 7화 엔딩에 등장하면서 수많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의 분위기와 설정, 장면 구성상 그녀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단순히 새로운 등장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서사와 얽힌 ‘상징’이자 ‘고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작진이 아무 설명 없이 ‘솜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인물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오히려 더 많은 추론을 가능하게 하며, 이번 글에서는 현재까지 등장한 장면과 대사, 감정 흐름을 토대로 ‘솜이의 정체’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가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솜이는 구천을 떠돌던 목사의 엄마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솜이를 목사, 즉 손석구가 연기하는 고낙준의 어머니로 보는 시각이다. 이는 낙준이 사고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솜이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는 과거 회상과 연결되며, 해당 장면 이후 낙준의 다리가 불편해졌다는 설정이 복선으로 작용한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장면 중 하나는 '팔찌'에 대한 설정이다. 이 드라마에서 팔찌는 ‘저승으로 갈 수 있는 자격’과도 같은 상징이다. 솜이는 팔찌를 버리고 도망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신의 아이를 교회에 두고 온 죄책감’과 연결되며, 그날 자신은 배가 고픈 와중에도 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었어’라는 내레이션은 그 죄책감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선의 응축이다. 목사와의 직접적인 조우는 아직 없지만,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는 점은 오히려 드라마틱한 재회를 위한 연출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즉, 두 사람의 첫 마주침이 마지막 회차 클라이맥스로 설정될 것이라는 추정이다.

 

 

 

 

 

2. 솜이는 젊은 시절의 해숙 또는 그녀의 잃어버린 청춘

두 번째 가설은 훨씬 더 상징적이고,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은유적 흐름을 따라가는 해석이다. 솜이는 곧 젊은 시절의 해숙, 혹은 그 시절에 해숙이 두고 온 ‘청춘’이라는 상징물이라는 분석이다. 이 가설이 힘을 얻는 이유는 해숙의 대사와 감정에서 비롯된다.

해숙은 반복해서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의 사진도, 추억도, 물건도 아무것도 없다. 젊을 때 목숨을 끊으려 했고, 삶을 놓아버릴 뻔한 순간 우렁이를 밟고 생에 대한 의지를 되찾았다고 말한다. 이 모든 고백은 해숙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때 솜이라는 인물은, 해숙이 버리고 도망갔던 자신일 수 있다. 낙준을 두고 죽으러 가려던 해숙은 아이를 되찾기 위해 ‘일수’라는 명목으로 낯선 동네를 들락거린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아이를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절실한 심정 때문이었다. 80년 인생 중 20년은 젊은 시절, 60년은 병 수발, 시집살이로 보내고 5년은 남는다. 목사는 다섯 살 때 헤어졌다고 한다. 기묘하게 숫자가 맞아떨어진다.

이 해석의 핵심은 ‘모습이 다른 이유’를 ‘청춘으로 돌아간 해숙의 이미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환생이 아니라, 후회의 정서가 만들어낸 의인화된 자아일 수도 있다. 즉, 솜이는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해숙의 죄책감과 바람이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이야기다.

 

 

 

 

 

 

3. 솜이는 해숙과 낙준이 키우던 반려견의 환생

이 가설은 다소 파격적이지만, 전개 구조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떡밥이 많다. 특히 드라마 내내 강아지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단순한 장치라고 보기엔 힘들다. 등장 인물 중 반려견을 이야기하거나, 동물에 얽힌 감정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유독 많았다.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기억의 결핍’이다. 목사는 다섯 살 무렵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어린 시절 기억의 부재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물적 감각으로 인간 세계에 남겨진 존재의 복선일 수 있다. 교회 앞에 묶어두고 “곧 올게”라고 했던 그날. 낙준은 사고를 당하고, 강아지는 그 자리에 남겨졌고,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 바로 목사라는 가설이다.

물론, 이 가설이 맞다면 드라마 전체의 장르와 세계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정도의 충격적인 반전이 되겠지만, 작품 내내 반복되는 강아지 상징, 목사의 기억 부재, 그리고 죽은 존재들의 재현 방식 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팬덤 내에서도 이 가설에 대해서는 "이게 맞으면 작가 절필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작품의 결이 너무 뒤틀릴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가설의 중심에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낙준이 솜이를 구하려던 그 순간. 그리고 이제 다시금, 현재의 시간에서 낙준과 솜이는 같은 공간에서 존재한다. 목사와 솜이는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이 둘의 관계를 끝까지 아껴두고 있다.

 

빨간 목도리 장면에서 낙준은 잠시 하늘을 응시하고, 목사 역시 그를 바라보다 허공을 본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시간이 분명히 있다. 드라마는 그 공백을 마지막 회차에서 어떤 식으로든 메꿀 것이다.

 

솜이는 누구인가. 구천을 떠돌다 돌아온 한 사람인가, 과거를 상징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사랑받고 싶었던 한 마리 동물의 마지막 기억인가. 그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음 덕분에, 이 드라마는 더욱 천국보다 아름다운 질문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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